손님

29. 근대사

초막 2021. 12. 19. 22:04

해방전후사를 생각해보다.
- 1945년부터 1946년까지
1945년 부터 1946년까지 정치권 력의 헤게모니가 
남한에서는 찬탁 반탁 운동을 거쳐. 이승만으로 
북한 에서는 김일성으로 어떻게 공고화 되었는지를 
남한에서의 좌우파 권 력투쟁을 중심으로 살펴 본다.
/
1945년에서 1946년까지의 남북한 
주요 정치적 이슈들을 시계열적으로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
1. 한반도
1943.11    카이로 선언 → 
1945.02    얄타회담(미.영.소) → 1945.07    포츠담 회담 → 
1945.8.15 한반도 해방 → 
1945. 12.27 모스크바 미.영.소 3상회의 : 한반도 5년간 신탁통치 결정
/
남한 
(좌파 선제기)
1945.8.17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여운형) → 8.20 박헌영 조선공산 당 재건→ 
9.6 조선 인민 공화국 선 포(여운형,허헌,박헌영 중심) → 9.8 미군상륙, 
미군정 시작 →9.16 한민당 결성(송진우 등) → 10.16 이승만 귀국 → 12월 김구 귀국 
(좌우파 투쟁의 시작)
1945년12월말 이후 반탁운동 전개 및 찬탁운동 세력과 대립
/
북한
1945.8.24 소련군 북한전역 점령, 소비에트식 행정 및 치안 집행기구 인 지역인민위원회 결성, 
프롤레 타리아 혁명 기초조건 조성 → 8월~9월초 소련은 남북한 철도. 
전신. 전화.우편 단절 → 9.19 김일 성 귀국 (푸카쵸프 호,원산 항) → 
9.20 스탈린 북한에 통일전선에 기초한 단독 (분단) 정권 수립 지령 → 
10.10 조선공산당 창당(북조 선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 결성) →

10.14. 소련군 주관 김일성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1945년 말까지 반탁으로 가다가

소련의 지령에 따라 1946년이후 찬탁으로 전환, 반탁세력(조만식 등) 무력화
/
1945년 ~1946년초 해방전후사 개괄 (남한)
해방후 전국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 에 있었다. 
그동안 방법은 다르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해 오던 좌파와 우파는 분열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성취한 이들은 
더 이상 협력 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대 해 각기 다른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 다. 
좌파는 사회주의에 입각한 평등한 유토피아를 

우파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자유 민족국가를..
두 입장 모 두 궁극적으로 민족의 행복한 미래 를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정치 이념의 대립은 양측을 타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해방정국에서 과연 그렇게 목숨걸고 싸웠던 정치이념이란 것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이념이란 정체가 창조적 경험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갑자기 맞이한 해방정국속에서 
각 정파의 이념에 기반한 권력욕과 헤게모니 정치공 학의 실험장이 되었다는 것과 
민족적 대의인 “하나된 민족국가”의 건 설에 

소흘했다는 점에서 아쉬운점이 많지 않았나 생각도 해본다
/
강만길 교수의 ‘20세기 우리 역사’ 에서는 

여운형의 인민공화국과 이 승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술하고 있다.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 본의 패전에 대비하던 여운형은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하고 그것을 기반으 로 건준을 조직한다. 
하지만 여운형등은 중경의 임시정 부보다는 

해방전부터 연안의 독립 동맹과 주로 교류를 가진다. 
해방후 건준은 급히 전국인민대표 자 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1945.9.6) 인공은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임명하고 
이승만이 귀국(10.16)하자 인공과 이승만 사이에 교섭이 이루어지고 좌우익이 함께 
독립촉성중앙협의 회 (약칭,독촉)을 결성하기로 합의 한다. 
이러한 좌우익의 민족적 대의에 대 한 초심들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어땠을까 아쉬운 가정을 먼 저 해본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한국인은 남과 북에 분단국가가 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 천왕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있을 무렵, 
조선 총독부의 정무 총감 엔도는 

국내파 독립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에게 일본의 패전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들이 안전하 게 자국으로 귀환 할 수 있도록 협 상을 벌인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각 석방, 사울의 3개월치 식량확보,
치안유지 및 건국사업에 대한 일제의 간섭 금지등을 약속받고 협상에 임 했다. 
그의 협상 결과 8월 16일 부당하게 옥살이를 하던 

정치범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석방되었고 
거리에는 해방을 기념하는 인파로 넘쳐났다. 
하지만 이들 앞에 험난한 난관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기쁨에 찬 군중들은 알지 못했다. 
암튼 해방은 되었다. 우리의 자력으로 이루었든

열강들의 힘의 논리에 따라 결정 되었든 
우리는 이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에 

너도 나도 얼싸안고 거리를 활보했다.
/
1945년 8월15일 해방과 동시에 출범한 여운형,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建國準備委員會)는 안재홍이 탈퇴한후 인민공화국을 설립했는데, 
그것은 좌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것이다. 
신간회 활동을 같이 하였던 여운형 과 안재홍을 주축으로 

건준위(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지방조직도 잇달아 발촉이 되면서 

해방후 8월말까지 145개의 지부가 자생적 으로 생겨났다. 
이제 우리의 자력으로 나라를 세우면 되는 것이 었다.
건준위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띤 인사들이 참여하며 
민족의 뜻을 대변할 수 있 는 범 민주적인 정부 수립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해방직후 한반도에는 민족주의 우 파계열의 사람들 보다는 

민족주의 계열의 좌파의 활동이 더욱 활발 하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 은 전면적인 토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물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는 인민정권을 세우려 했다. 
여운형의 건준위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은 미군이 한번도에 들어오기 전에 
합법적인 정부를 만들어 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1945년 9월6일 광복이 된지 한달도 안되어 인민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공산당의 주도 로 조선 인민공화국이 건국 되었음을 선포했다. 
조선 인민 공화국엔 우익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정적 결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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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도 미군정청에 등록한 정당 이 205개나 되어 
10월5일부터는 주요정당 대표들이 정당통합운동 을 추진하였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 좌우정당의 연합체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부 독립운동에서

전향한 친일파까지 포함될 수 있 는 애매한 단합 방침은 
독립운동자 를 실망시켜 그의 정당통합의 초당 적 위치는 흔들리게 된다.
민족주의 우파계열의 송진우, 김성수 등은

건준에 참여 지 않고 별도로 한민당을 결성했다. 
한민당에는 민족주의 우파와 일제하의 지주, 기업인들 

그리고 친일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뺏앗기지 않기위해 
좌파계열의 건준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 다.
한민당은 한발 더 나아가 사회주의 를 반대하고 

일제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 하 자는 조선 인민공화국을 타도 하자고 주장했다. 
건준위와 한민당은 이렇게 해방직후부터 대립각을 세웠다
/
이무렵 미소가 한반도에 승전국의 조건으로 기세등등하게 등장한다. 
하지중장의 미국은 1945년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다. 
미국은 건준 위나 인민위원회 활동 및 대한 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했고 
오직 미군정만이 합법적인 통치 기관이라며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에 의한 직접통치를 실시했다. 
어찌 되었든 미국과 소련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점령한 것 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에만 저항하면 되었는데

이제 모셔야 할 상전이 둘이 생긴 것이다
/
그리고 한국인들도 이념에따라 분 열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김구와 이승만은 남한으로 김일 성과 김두봉은 북한으로 귀국 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중시 하여 중경임정과 

인공의 대등한 합 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인공 역시 자신들이 대중적 지지를 많이 받고 있으므로 

중경 임정 아래로 들 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촉 결성 대표자회의에서 분 단 반대, 신탁통치 반대, 
조선에 대한 점령국 예우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4대 연합국에 보내는 선언 서” 를 
이승만이 기초하여 채택하 게 되었을 때, 

박헌영은 “친일파 제 거에 의한 민족통일 원칙”을 주장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조선공산 당은 독촉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 한다.
이후 우익쪽의 선 좌우익 통합후 친 일파제거론과 

좌익쪽의 선 친일파 제거후 좌우익 통합론이 맞섰다. 
그런 가운데 좌익계의 전국청년 대 표자대회는 “만약 이박사가 인민 공화국 주석을 거부한다면 
지도자 로 지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 족통일 전선 

분열의 최고 책임자로 규정한다” 는 결의문을 발표한다 .(11.6)
이에 이승만은 11월 7일 임정의 한 사람으로서 임정과의 타협없이는 인공에 관계할 수 없다고 했고 
11월 16일에 조선공산당이 탈퇴하 면서 20일 인민공화국 산하에 전국 인민 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촉성 중앙협의회와 대립했던 것이 그것 을 말한다. 

그 때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환국한 것이다.
일정한 명성은 있지만 국내에 지지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과 그의 명성 을 어느정도 인정했던 
조선공산당 중심의 인공사이에 합작이 이루어 질 듯 했으나 
광범위한 세력을 포섭 하여 지지기반을 넓혀가야 했던 이 승만과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 나 
친일파 숙청이 좌익세력 사이에 이해관계가 대립하여 합작이 실패 한 것이다. 
오늘날의 정국도 어쩌면 양태만 다 르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
수백개로 난립한 정당, 좌우와 중립으로 노선이 분화된 정국의 수습은

이제 임시정부가 떠맡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중경(重慶)에서 통일전 선 형성에 성공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해방후 9월3일에는 1940년에 공표한

건국강령(建國綱領)에 입각하여 당면과제를 발표하였다. 
그것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귀국하여 과도정부를 세우고

해체한 후 과도정부가 정식 정부를 건립한다고 했다.
그러나 중경의 임정세력들은 반탁 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기 시작한 
12월 하순까지 뚜려한 비젼을 제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국내파 여운형과 박 헌영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승만과 한민당을 지원했다. 
김구는 상해 임 시정부와 한국 독립당 세력을 중심 으로 활동했다. 
농민들도 전농을 중 심으로 단결했고 노동자들은 전평 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학자들은 조선 학술원을 조직했고 문화예술인들도 연합 조직을 결성 하여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건설하여 

새로운 민주 국가를 만드는데 힘을 합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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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에서 우리민족이 만들어 가 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누구도 반대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선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주인의 식으로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민중들의 요구 와 희망대로 세상이 움직이기에는 세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즉 이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세력이 넘어야 할

또 다른 커다란 세력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계 정세는 움직 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정치이념싸움은 어 쩌면 그렇게 

우물속 개구리들의 싸 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그리하여 12월19일 임시정부 환영 대회가 열렸을 때, 

백범은 답사에서 "임시정부는 결코 어떤 일계급, 
어떤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 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에 입각 한 민족 단결의 정부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도를 제외한 우리 동 포는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단결이 있은 후에야 

우리 독립 주권을 창조 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좌파가 계급국가를 지향했다면 백 범은 모든 계급의 공동이해에 입각 한 국가를, 
이승만이 친일파까지 단 결을 지향했다면 백범은 친일파를 숙청한 단결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환영대회가 끝나고 백범 이 민족세력의 총집결체로서 
특별 정치 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의 구성을 준비하자 정가의 주목을 한 몸에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과는 달랐다. 좌파의 인민 공화국은 임시정부와 대등한 정부 적 존재 로 자처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임시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려 했다. 
그런 가운데 한민당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어 
자연 이승만과 한민당 의 결속이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백범이 중경에서 계획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특별정치위원회의 구성도 쉬울수 없었다.
/
그럴 때 1943년부터 걱정되던 신탁통치안을 노골화한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12월28일의 일 이었다. 
5년간의 신탁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정부를 미소 주둔군 사령 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백범은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결의를 하고 
각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결성 했는데 
이것은 이미 추진하던 특별 정치 위원회의 대안이기도 했다.
1945년 12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를 열어 한국 문제를 협의 하였다. 
이것은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맺은 "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 는 
바로 그 적절한 과 정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였다.
이무렵 동아일보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데 대해 
소련이 38도선 이북이라도 점령할 목적으로 신탁 통치를 제안했다는 오보를 낸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사와는 달리 신탁통치를 제안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
미국의 루즈벨트는1945년 2월에 있던 얄타회담에서는 30~40년의 산탁통치를 주장하였고 
12월 모스 크바 3상회의헤서는 5년을 주장하고 

협의에 따라 5년을 더 연장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조선의 통일된 임시 정부와 상의하여 
최고 5년간의 모스크바 3상회의신탁 통치안 을 작성한다. 라고 발표한 것이다.
이승만은 제빠르게 한민당을 중심 으로 반소,반공,반탁진영을 구축했고 
김구는 임시정부가 과도정부를 이끌겠다고 주장하면서 반탁운동 에 합류했다. 
김구측은 반탁의 초기 국면을 주도 하면서 중경 임정 추대에 열중했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탁운동을 이 용하여 점차 단독정부 수립에 치중 했다. 
하지만 반탁 의사를 견지했던 중도파와 좌파진영은 

회의를 통해 1946년 신탁 찬성 입장을 전환한다. 
역사엔 가정은 없지만 만약 좌파쪽에서 반탁 입장을 계속 견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동아일보가 오보를 내고 반탁을 견지하던 좌파는

1946년 친탁으로 방향전환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부터 여론은 우파로 급격히 선회했다.
/
반탁위원회는 권동진,안재홍의 이름으로 조직하여 31일에는 백범이 선두에선 
시민대회를 서울운동장 에서 개최하는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같은 날 국자(國字) 제1호를 선포하여

전국의 행정과 경찰기구를 접수한다는 것과, 
국자 제2호로써 "국민은 우리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 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고 주권행사를 선언함 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은 분명히 자주독립의 적극적 인 표현이었으나 
미군정으로 보면 반탁 정변이었다. 혹은 반쿠테타 라고도 할수 있다. 
미군점령하니까 반탁쿠테타 이기는 해도 

외세를 배격하는 백범의 투철한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백범이 선봉에 선전국적인 반탁열기와 반탁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장군은 모스크 바 삼상회의 전부터 신탁통치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지만 
백범의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지는 임정요인을 감금 추 방할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긴장이 극도에 오른 새해 1월1일 반도호텔에서

김구.하지회담이 열려 가까스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평화적 반탁 운동의 전개로 합의한 것이다.
/
반탁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좌파가 놀란것은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서면 
그들의 인민공화 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 다. 
그게 아니더라도 반탁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정부가 

전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1일 임시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 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 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정국에 맞추어 2일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3일 찬탁대회를 열었으며 백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찬탁 반탁정국은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 갔고 
그 가운데 백범은 반탁과 우익의 영수로 자리 잡혀져 갔다. 
백범은 1월4일 좌파를 향해 비상 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좌파가 참여한 정부 로 확대 개편하고 이어 임시정부를 대신하고 
정식정부를 수립할 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다. 
그를 위하여 김원봉,김 성숙,조소 앙,조완구,장건상을 대외교섭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여기에서 통일전선을 추구하면서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던 백범노선을 살필 수 있다. 
임시정부의 법률을 전제한 모임에 좌파가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기가 힘들었으나 
미소공동 위원회를 앞 둔 마당이어서 l월7일 한민당,국민 당,인민당,공산당의 4당회의가, 
8일에는 신한민족당이 참가한 5당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무산되자 백범은 2일부터 5일간 비상정치회의준비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 협의회와 합류할 것을 합의하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중심한 
비상 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개최키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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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반탁의 국면속에서 좌파의 찬탁으로의 정치노선의 변경은 
우파로 급속히 돌아간 여론을 돌리기에는 이미 때는 늦었고 여론이 우파로 급선회 하자 
친일들은 반탁이라는 시대의 조류를 타고 신분세탁을 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신탁과 반탁에 대한 프레 임 싸움이 시작된 것인데, 
찬탁반탁 프레임 속에서 친일세력들은 기사 회생하는 계기가 된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시점 이후 수월한 통치를 위해 일제시대 총독부 관리나 경찰 들을 채용했으며 
일본 기업을 자주적으로 관리하겠다던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미군정은 기업에 별도의 관리인을 파견했다. 
물론 친일세력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친일세력들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행정경험이 있다는 관리의 수월성에서 기인한다. 
한마디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토지분배 역시 일본 측으로부터 몰수한 토지에 대한 분배를 기대했던

농민의 뜻과는 달리 미군정이 직접 관리했다.
이승만 합류에 임시정부의 혁신계 인물인 김원봉,성주식, 김성숙, 장 건상이 탈퇴하여 
국민회의는 우파의 집결체가 되었다. 
2월 1일과 2일에 그러한 비상 국민 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군정청 에서 2월14일 비상국민회의 위원으로 그들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民主議院)을 구성하여 비상국민회의는 사실상 민주의원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 좌파에서도 15일에 민주주의 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니 

좌우익 조직이 구조적으로 정착해 갔다.  
1946년초까지의 남한정세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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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9dvYI1DK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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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BxUjG9KW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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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Q_TcB4-2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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