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불산

45. 파자소암(婆子燒庵)

초막 2024. 1. 22. 20:20

노파는 왜 암자에 태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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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파가 한 스님의 수행을 돕기 위해 암자를 지어 뒷바라지했다.
노파는 항상 젊은 딸을 시켜 밥을 보내고 시중들게 했다.
20년이 지난 뒤 스님을 시험하기 위해 딸에게
"스님의 무릎에 올라가 교태를 부려보라"고 일렀다.
딸은 스님을 껴안고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고목나무가 찬 바위에 기대니
엄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스님은 저 같은 소녀가 정을 주어도 안 받으시겠네요.”
소녀의 물음에 스님이 다시 말했다.
“도대체 정이라는 걸 못 느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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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얘기를 전해 들은 노파는 장탄식했다.
“아! 내가 저런 땡중한테 20년간 시봉하느라 헛고생만 했구나.”
그러고는 스님을 내쫓고 암자를 불태워 버렸다.
스님이 쫓겨나지 않고 암자도 불에 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선가에 널리 알려진 ‘파자소암(婆子燒庵)’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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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깨달음의 목적이 번뇌와 욕망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번뇌와 욕망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고목일 뿐이다.
당나라의 위산 영우선사도
“목욕탕에서 젊고 앳된 여자가 옷을 벗고 몸을 씻어줄 때
쇠로 만든 부처님도 진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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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머릿속에는 하루에도 5만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그 많은 생각과 함께 일어나는 번뇌와 욕망을 무슨 수로 모두 없애겠는가?
과학적으로도 도저히 불가능하다.
만약 생각과 번뇌가 완전히 멈춘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고승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고장난 환자다.
파자소암의 스님처럼 엄동설한에 내쫓기는 처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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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임제선사는 스승이 죽자 슬피 울었다.
다른 제자가 그 광경을 보고
"생사 해탈을 위해 배우는 자가
어찌 그리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했다.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물론 나도 죽고 태어남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스승을 오랫동안 보아 온 두 눈이
이제 더 이상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나더러 그 눈물을 틀어막으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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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도 배가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도인도 죽음이 슬프고 고통을 당하면 아프다.
다만 범부와의 차이가 있다면 '동(動)하지만 부동(不動)한다'는 점이다.
번뇌와 욕망을 느끼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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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다라면 번뇌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이다.
바다는 파도를 붙잡지 않는다.
파도를 막지 않고 그냥 치도록  내버려 둔다.
집착하지 않으니 자유롭다.  
그것이 주인된 삶이다.
(배연국)-- 모셔온 글
https://youtu.be/tUm9JYdYE5Y?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