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 (이승만)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중소기업가의 세 딸 중 막내로, 아버지 사업을 맡아 하던 중 이승만이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총회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1933년 초에 처음 만났다.(이승만 58세, 프여사33세) 뉴욕에서 결혼 한 후에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헌신했으며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제1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국민들은 파란눈의 영부인을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근검절약, 축첩반대 등을 몸소 실천하며 이승만의 개인 비서 역할도 맡아 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에게 인의 장막을 쳤다는 비난도 받았다.
1960년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와이에 망명했을 때 프여사는 망명지 병원에서 1965년 남편이 사망할 때 까지 헌신적으로 남편의 병구완을 하여 미국에서 '베스트 와이프'(Best Wife)라는 별칭도 받았다. 이승만이 별세한 뒤 그녀는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1970년 박정희대통령의 권유로 한국에 돌아와 이화장(梨花莊)에서 양아들 이인수 가족과 함께 단란한 생활했으며 1992년 3월 19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평생 사랑하던 남편 곁에 묻혔다.
나는 프여사가 서양인이면서도 내면은 한국의 여인상을 간직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독재자로 몰릴 때까지 옆에서 조언을 못한 것은 지아비의 바깥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으로 느껴진다.
공덕귀 여사 (윤보선)
공덕귀는 1911년 경남 충무 지역유지의 7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40세 때 당시 서울시장이던 윤보선(윤보선은 재혼)과 결혼할 때까지 선교사, 신학교수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던 신여성이었다. 1960년 윤보선이 제2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단아한 한복차림으로 내외 국빈을 맞이하여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재야로 돌아온 공여사는 남편을 따라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으며 여성노동운동, 인권운동 등에 헌신하였고 만년에는 교회일치운동에 헌신하였다. 1993년에는 건강을 잃고 치매까지 왔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1997년 11월 병세가 악화되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나는 공여사가 각종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신문기사, 사진들을 기억한다. 영부인까지 했던 사람으로서 그토록 험한 시위현장에 뛰어 들었던 공여사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었다.
육영수 여사 (박정희)
1925년 충복 옥천 지역유지의 1남3년 중 둘째딸로 태어난 육영수는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옥천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하다가 1950년 당시 육군 대령이던 박정희와 결혼했다.(박정희는 재혼) 1963년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으로 영부인이 된 육여사는 청와대 내에서는 야당 역할을 했으나 밖으로는 국민의식개혁 운동에 앞장서며 사회소외계층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한복의 자태가 무척 잘 어울리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던 육여사는 박정희의 강한 인상을 커버하는 영부인으로 평가받았다.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경축식을 하던 중 재일교포 문세광에게 피살 당한 육여사를 온 국민이 진심으로 애도하였고 지금까지도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나는 육여사가 역대 영부인 중 가장 훌륭했다는 평가에 공감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좀더 오래 살아서 박정희를 내조했다면 10.26처럼 불행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홍기 여사 (최규하)
홍기는 1916년에 충북 충주에서 한학자 홍병순의 3녀 중 맏딸로 태어나 19살 되던 1935년 당시 경성교보학생이던 연하의 최규하와 결혼했다. 홍여사는 정규학교 교육은 받지않고 웃어른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는데 결혼 후 남편이 귀향할 때까지 8년간 홀로 시집살이를 했던 대표적 유교문화의 상징적 여인이었다. 그 후 공직생활을 하는 남편을 조용히 내조하며 근검절약을 실천하였고 짧은 청와대 안주인 시절에도 양로원, 보육원 지원활동만 했을 뿐 대외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2004년 알츠하이머병으로 타계할 때까지 홍여사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국의 전형적인 부덕을 몸소 살아온 훌륭한 여성이었다.
나는 최대통령 퇴임 후 홍여사를 탐방했던 여성잡지 기사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어떤 물건이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쓴다는 근검절약 수칙이 엄격했으며 특히 다 쓴 커피병을 씻어 양념통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안 잊혀진다.
이순자 여사 (전두환)
이순자는 1939년 만주에서 군인이었던 이규동의 1남 6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경기여중고를 나와 이화여대 의예과 재학 중이던 1958년, 아버지의 부하 전두환과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전두환 28세, 이여사 20세) 생활력이 강해 미용실과 복덕방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컬러 TV에 비친 41세의 영부인은 사치스럽다던가 어디든지 동부인하는 바람에 경망스럽다는 비난도 받았다. 전두환의 백담사 칩거 시절 이여사는 그동안 희생된 민주영령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하며 참회했다고 하면서도 전두환의 통치가 잘못되었다는 점은 동의하지 않았다. 얼마전에도 전두환의 추징금 2천205억원 중 532억원을 납부했으니 더 이상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여사에 대한 80년대의 이야기를 여러 개 기억한다. 그 내용은 모두 이여사의 치맛바람을 빗댄 것이지만 한편 누가 뭐래도 남편을 끝까지 옹호했던 점은 이여사 역시 여필종부라는 유교적 사고방식을 지녔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남편이 올바르지 않은 길을 갈 때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녀의 가치관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김옥숙 여사 (노태우)
김옥숙은 193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경북여고를 졸업했으며 1959년에 오빠 김복동의 친구였던 노태우와 결혼했다. 전두환과도 절친이었기 때문에 이순자 여사와 깊은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1987년 대통령이 된 노태우를 따라 청와대 안주인이 되었을 때에는 전임 영부인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드러나는 행보를 펼치지 않았으며 '그림자 내조'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보통사람임을 강조했던 남편 노태우를 따라 조용한 내조로 일관했으나 최근 아들 노재헌이 결혼 21년만에 이혼 소송을 하면서 사돈이었던 신동방 그룹을 향해 424억을 되돌려 달라고 한 것은 노태우 일가와 김여사에게는 불명예스러운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김여사가 노태우 선거운동 당시 경북여고 동창회에서 머뭇거리는 어조로 “잘 부탁합니다” 한 마디만 했다는 기사가 기억난다. 그 때 내 느낌은 천상 여자구나 라고 남았는데 평범한 가정주부가 일국의 영부인이 되면서 겪었을 남다른 고충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노태우가 80년대 신군부 세력 중 가장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김여사의 내조 덕분이 아닌가 한다.
손명숙 여사 (김영삼)
손명숙은 1929년 2월25일 경남 김해에서 경향고무 사장이었던 아버지 손상호의 2남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마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약대에 수석 입학한 손여사는 1951년 당시 서울대 철학과 4학년이었던 김영삼과 맞선 본 지 한달만에 결혼을 했다. 이화여대는 기혼자를 자퇴시키는 전통이 있었지만 6.25 전쟁 통이라 학사운영이 제대로 안된 가운데 무사히 학업을 마쳤으며 투철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대통령의 꿈을 가졌던 정치인 김영삼을 내조하였다. 손여사 역시 절약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누구에게라도 따뜻한 밥을 대접하였다. 1993년 65세의 나이로 영부인이 된 후에는 의례적인 고위 공직자 모임도 갖지 않았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세계여성회의에 참석한 것이 눈에 띌 뿐이다
나는 손여사 영부인 시절 공식석상에서 화장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순자, 김옥숙 등 전임 영부인이 젊고 화려했던 것을 의식해서 그랬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파란많은 정치인 김영삼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그녀 역시 여필종부의 미덕으로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이희호 여사 (김대중)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희호는 이화여전과 서울 사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한후 YMCA 등 여성운동 분야에 종사하였다. 1962년 김대중의 비서로 일하던 중 40세의 나이에, 당시 전처를 사별한 37세의 김대중과 결혼했다. 재야 정치인었던 김대중을 보필하고 공덕귀 여사 등과 민주화 운동을 펼치면서 김대중 납치 사건, 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민주화활동을 하다가 1998년부터 5년간 영부인으로 살았다. 천주교인 김대중과 감리교인 이여사의 서로 신아을 존중해주는 모습, 집의 문패에 나란히 부부 이름을 적는 등 남녀평등을 실천하고 김대중을 남편으로서보다는 뜻을 같이하는 평생 동지로 여겼던 이여사는 한국 여성 운동의 산역사라고 할만하다
나는 이여사가 노구를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통일을 염원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지난 8월 박근혜 후보의 방문을 받고 여성대통령이 되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질 것이라는 덕담도 건넸지만 과거사를 잊는다고 고통은 치유되지 않으며 진실 규명, 가해자의 사과, 정의의 회복만이 피해자들의 한도 풀리고 아픔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공감한다
권양숙 여사 ( 노무현)
권양숙은 1947년 경남 마산에서 권오석의 1남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나 부산 부산계성여상 3학년 때 중퇴하였다. 1973년 사법고시준비생이던 노무현과 결혼, 2003년 영부인이 되었다. 당시 대선 중에 권여사의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소문으로 곤욕을 치뤘으나 노무현은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 하면서 여론을 잠재우기도 했다. 또한 권여사는 영부인의 학력이 낮다는 저차원적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은 인신공격하는 사람들의 인품이 낮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비교적 조용한 내조로 청와대를 지키다가 퇴임후 봉하마을에 안주한 권여사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결국 노무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가는 커다란 아픔을 겪기도 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인간성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권여사에게는 그리 호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아마도 권여사를 둘러싼 흑색선전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조금 물들었을 것 같다.
김윤옥 여사 ( 이명박)
김윤옥은 1947년 경남마산에서 태어나 3살 때 대구로 이사, 대구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보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오빠의 소개로 당시 현대건설이사였던 이명박과 결혼했는데 이여사의 성격이 활달하고 낙천적이어서 평생 전업주부로 살면서도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고 가정 경제를 일으키는 이재에도 밝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나는 한낱 월급쟁이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대통령의 능력도 있었겠지만 아내의 내조가 없이는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대통령 취임식 중계를 보면서 가장 부러움을 느꼈던 영부인이 김윤옥 여사다. 그러나 이대통령의 퇴임후 각종 비리에 얽힌 사건들로 결코 평탄치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