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새마을 운동/
새마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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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심에 서서
7-80년대를 주름잡으며 우리의 삶을 확 바꾸어 놓았지요.
그리고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을 마련한 국민운동으로
후세(역사)에 오래도록 길이 빛날 혁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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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 새마을 사업은 당시 신군부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추진의 속도와 힘은 절정에 달하였으며 절대적인 사업이였지요.
주민들과 대면하여 이를 실행하는 일선 최말단 읍.면,동사무소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일 년 365일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앞장서 진두지휘하는 시골 면장님은 항상 잠바와 농구화 차림으로
밤낮 현장을 직접 지도점검 하느라고 늘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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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지붕개량 주택개량 마을안길확장사업을 넘어
80년대 초에는 취락지 개선, 마을진입로 및 안길포장, 변소개량, 부엌개량
육우입식 복합영농 기타 등등 소득사업 및 생활환경개선사업에 주력하였지요.
어느 날 새마을 시범마을에 호주에서 방목하던 소를 도입하여 터럭에서 내리는데
면장님이 어렸을 때 소를 많이 다루어 보았다며 시범을 보이려고
젤 먼저 터럭위에 올라가 소고삐를 바짝 잡고 내리는데
코뚜레도 하지 않은 방목하던 거친 소가 먼 길을 오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바닥에 닫자마자 면장님을 깔고 뭉개고 거시기를 밟고 벌판으로 내 달렸습니다.
면장님은 쓰려져서 거시기를 움켜잡고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뒹굴고
동네사람들은 웃음을 못 참고 킥킥거리며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 급히 읍내 병원으로 이송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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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군수님이 새마을 사업 시범마을을 방문하였을 때는
면장님은 아직도 다 낫지 않아 절룩거리며 가끔 거시기를 만져가며
군수님 앞에서 새마을 사업 추진 현황을 멋지게 브리핑 하고나서
시범 농가에 들러 3조식 개량변소를 설명하면서 또 사고를 쳤습니다.
분뇨(똥통)뚜껑을 열어 놓고 3단계를 거쳐 마지막 3단계는
이렇게 굳어서 냄새도 안 나고 위생적인 것을 강조하려고
위 꺼풀만 살짝 굳은 분뇨 위를 한쪽 발로 쾅쾅 구르다가
그만 철퍼덕 하고 구르는 발이 빠지자 군수님만 겸연쩍게 웃었고
주위에 사람들은 군수님 앞에서 웃지도 못하고 황당해하였지요.
성질 급한 면장님은 마을 앞 개울가로 달려가서 대충 헹구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신발을 그대로 신고 하루 종일 군수님을 안내하였는데
무더운 여름날 냄새도 엄청 났을 것이고 무좀도 걸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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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알려지면서 직원들 간에는 촐랑이 면장님으로 통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토요일도 6시에 퇴근하고 일요일 공휴일에도 나와서
눈도장을 찍고 오후가 되어서 눈치 슬슬 보면서 퇴근하던 시절이였습니다.
그러니 평일에는 통상 8시까지 출근이 기본이고
뻥긋하면 비상이다 뭐다 하며 새벽에 나오기 일쑤였고
매월 정기 반상회와 수시로 임시 반상회를 개최하니
별보고 나와서 별보고 들어가는 날이 다반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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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은 재건복이나 잠바 차림에 운동화나 농구화를 신고
“새마을운동활성화” 라는 새파란 표찰도 늘 가슴에 달고 다녔습니다.
갓 결혼한 어느 직원은 항상 늦게 들어가 마누라 입이 한발 나와서
서숙을 한 자락 안겨 주었드니 다음날 얼굴이 확 펴 지더라며
선술집에서 대포 잔 기울이며 이런 속내도 털어놓았지만
그 시절(5공시절) 어디 국가 정책을 비판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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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님은 새마을 사업장 방문 때마다 막걸리 격려가 기본이고
하루에도 여러 마을을 돌다 보면 막걸리 값, 길흉사 부조 등으로 나가는 돈이 많아
월급봉투를 통째로 서랍 속에 넣어 두고 곶감 빼먹듯이 꺼내어 썼습니다.
70년대 숙직비가 300원에서 500원으로 80년대에는 700원 1300원이였는데
그 당시 무슨 시간외 근무수당이 있고 휴일 근무수당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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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숙직비도 현실화 되어 5만원이고 넉넉지는 않지만
시간외 근무수당 휴일 근무수당도 있는데 세상 많이 좋아졌지요.
아직도 그 시절 새마을 운동의 주역들은 팔팔하게 살아 있는데
이런 야기는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촐랑이 면장님도 지금은 고인이 되셨는데
별명이 촐랑이 면장님이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합니다.
이게 삶이고 인생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