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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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 부처님은 앉아서 천리를 내다본다는데 속세의 사람들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천리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펼쳐질 십리는 보입니다. 마지막 갈 때는 지난 온 길을 돌아보며 뉘우친다는데 그때는 왜 좀더 베풀지 못했을까 왜 좀더 양보하지 못했을까. 왜 좀더 참지 못했을까 라는 “3왜”를 말한다지요?? . 지난날을 돌아보면 앞으로 펼쳐질 백리 길도 보입니다. 그것이 안 보이니 앞길도 캄캄합니다. / 선남선녀가 첫 만나의 선을 볼 때 궁금한 것이 참 많지요. 그의 어미를 보면 딸을 아비를 보면 그의 아들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기에 평상시의 과업이 그대로 비쳐옵니다. DNA만 유전인자일까? 평상시의 언행이 더 확실한 유전인자이지요. 옛날 할머니들이 어쩌면 너어미 애비를 그렇게 쏙 빼 닮았냐고 할 때 외모, 행동, 습관, 버릇, 성격등등 총체적인 것을 일컫는 것이지요. 요즘 세상에 직업의 대물림은 없다지만 3대가 군인가족, 5대가 교육자 집안, 법조, 의료. 스포츠, 등등 보통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업이지만 대를 이어 부모 따라가는 것을 자주 봅니다. 물론 부모따라 재능과 기능의 차이가 있겠지만 평상시 보고 듣고 느낀 환경이 절대적일 것입니다. 남이 잘된다고 그대로 따라가면 항상 2등이지요. 작년에 배추 값이 좋았다고 올해도 좋다고 보장할 수 없고 앞차 따라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앞차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고 앞서가려면 추월선으로 들어서야 하지요 그런데 세상일 이라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네요. / 예수님이 늘 사랑하고 감사해 하며 살라고 하셨는데 두눈 두귀 있어 잘보고 듣고 두팔 두다리 있어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이런 내가 내 벌어 내 먹고 사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감사해하며 살라는 말인가. 그러나 어느 한곳 삣긋하면 의지대로 할 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고 나도 세상도 모두가 원망스럽지요. 아 옛날이여 하고 되 뇌여 봐도 엎질러진 물 다시 담을 수 있겠는가. 그때서야 불편해지고 약해진 곳을 더 사랑하게 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세상을 달리 본다. 어리석음으로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 대상은 너무 많다. 불경에서는 병고로서 양약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였다. / 아침저녁으로 뉴스만 잘 봐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뉴스타고 흘러나오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 지축을 흔드는 구제역이다 지진이다 홍수다 등등 뜻하지 않은 이런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는 안간은 미약한 존재 안타까움은 공감 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렇게 실감나지 않으며 이런 일 당한 당사자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인데 막상 그 중심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 오늘도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길 잠시 딴 생각으로 삣긋하거나 내가 아무리 잘하더라도 옆 차가 박을 수도 있는 사나운 운수 등등을 피해 왔다면 내 잘났다고 교만할 수 없고 뭔가는 감사한 마음이 들지요. 옛날 시골버스 운전석 우측 중앙에 매달린 두손모아 기도하는 인형 덜컹거릴 때마다 인형에 쓰여진 글귀“아빠 오늘도 무사히”도 함께 출렁이는데 그래서 그럴까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고 손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며 나도 손님중 한명 이였지요. 이렇게 세상엔 감사해 해야 할 것이 많은데 그 동안 나만의 독불장군 식으로 살지는 않았는지. 깨닫지 못하면 나도 이런 뉴스의 중심에 설수 있습니다. / 이빨하나 빼려고 치과에 가면 당뇨 혈압은 없냐 지혈은 문제가 없냐 지금 먹는 약은 없냐 등등을 체크하고 하루 전 약을 먹게 하고 뺄 때는 마취주사 놓고 언제 뺀는지 모를 정도로 아프지 않게 신중하게 뺀다. 60년대 초등학교시절 보건소에서 나와 물어 보지도 않고 앞니 두 개가 젖니라며 마취도 없이 아프건 말건 무작정 확 잡아 빼고 솜 하나 물려놓고 찬물 먹지 말라는 것이 처방의 전부였지요. 그때 의사는 이것저것 다 보는 비전문치과 의사이고 지금은 치과 전문의사가 신중하게 치료합니다. 어디 치과만 이럴까요. 세상은 전문가 넘쳐 나고 살기가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보다 불평불만이 더 늘어만 갑니다. 세상의 번뇌는 부처님의 108번뇌보다 더 많고 어지럽습니다. 삶의 높은 담장 위를 걸어가는 세상살이 높이에 적응하지 못하여 현기쯩을 느낍니다. 한눈팔거나 바람이 불거나 운수가 사나우면 언제 어디로 어떻게 떨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잘못 떨어지면 사망할 수도 불구가 될 수도 죄인이 될 수도 영원히 재기가 불가능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삶의 높은 담장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겸손해하며 아래를 잘 보아야 하지요 위만 처다 보면 현기쯩 느껴 떨어집니다. 그렇게 떨어 진자들을 그동안 많이 보아 왔는데 타산지석이 되지 못하였으니 불안한가 봅니다. / 시골에서 모내기하려고 마른 논을 갈고 물을 대놓고 논둑 밑을 다지(밟으)며 논둑 하는 풍경을 봅니다. 개미나 벌래(땅강아지)가 논둑에 조그만 구멍을 둟는데 다지기가 허술하면 모심기이후 논물이 빨리 잦아들고 장마 때 물이가득하면 둑이 터집니다. 바늘 구멍만한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논둑이 무너지는데 옛날 어르신들이 논둑 다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질병이나 사고도 처음 다지기를 잘하면 비켜갑니다. 이런 생활 하나하나가 곧 깨달음이요 모여서 역사가 되겠지요. / 자살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크게 2가지 같습니다. 하나는 남에 대한 억울함과 원망 남 탓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과 질책입니다. 어느 것이든 지난날의 후회와 절망감의 발로입니다. 부족함의 어리석음이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많은 삶 이 또한 부질없는 욕심이겠지요. 뉘우치고 깨달았을 때는 몸은 늙고 병들어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전에 앞길 백리를 내다본다면 지혜로운 자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겠지요. 인생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닐 런지요.